본문은 문예춘추(文藝春秋) 2009년 4월호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로서, 원제는 '나는 왜 예루살렘에 갔는가(僕はなぜエルサレムに行ったのか)' 입니다. 문답 형식이 아닌, 자전 형식으로 쓰여진 인터뷰로서, 그가 예루살렘상을 수락하고 연설하게 된 경위 및 심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과 동일하게 말미에는 연설문 원고를  번역하여 실을 예정입니다(다만 본문이 꽤 긴 관계로 두 번에 나누어서 올려야 할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다음 번 2부가 올라올 때 같이 올릴 듯 싶습니다).

번역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역이 많은 편입니다(원래 저의 번역방침이 그런 편입니다). 그 외에, 하루키는 본문에서 경어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어로 경어체 번역을 할 경우 어감의 문제도 있으며 특히 한국에서는 보통 인터뷰나 자전체 글에서 경어를 생략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관계로, 한국식으로 경어를 생략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출처 : 연합뉴스)




2월 15일,  나는 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상을 수상하고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1월 하순에 수상 소식이 보도된 이래, 인터넷에서는 내가 수상 거부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다. 또 일부 신문들은 내가 오사카의 NGO단체가 발표한 공개질의에 대답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스라엘 군의 가자 침공에 항의하는 뜻으로 수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될 것이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사실, 나 역시 이 상을 받아야 하는지, 혹은 거부해야 하는지 꽤 긴 시간을 망설였다. 하지만 '상을 받기도 전에 이에 대해 의견표명을 한다는 것은 순서가 약간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름대로 여러 요소를 고려한 끝에, 개인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대해 사전에 변호나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원래 내 성미에는 맞지 않는다. 묵묵히 그 곳에 가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돌아와야겠다,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뭐 그 결과로 내 발언에 대해 누군가 비판한다고 해도 별 수 없는 일이다. 내 행동을 결정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고, 그런 이상 비판은 달게 받아야만 하는 것이니까.

친구들, 그리고 친분 있는 편집자들로부터도, 가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충고의 이메일이 오곤 했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장편소설이니, 챈들러의 번역이니 하는 일감을 세 권 분, 400자 원고지로만 4200장 정도를 떠맡고 있었고, 이스라엘로 떠나기 전에 이것들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말하면 1분 1초가 아쉬웠던 상황이었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을 여유는 전혀 없었다.

다만, 이것은 내 나름대로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세월 사귀어 온 사람들조차 그런 부분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좀 서운한 느낌도 들었다. 일본을 떠날 때는 고립무원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백주의 결투(원제 : High Noon - 역자 주)>의 게리 쿠퍼가 된 기분이랄까. 뭐, 그리 멋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기분상.



수상을 받아들인 경위


주최측에서 예루살렘 상의 수상 용의가 있는가 하는 문의를 해 온 것은 지난 해 12월 25일이었다. 이 때는 상을 받아야 할지 거절해야 할 지, 매우 고민했었다.

나라는 인간 역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는 편이었다. "외눈 장군"으로 일컬어지던 다얀 국방장관 시절부터 언론 보도를 체크하고 있고, 관련 서적들도 일단은 읽어 보는 등, 역사적인 경위도 대강은 머릿 속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유대계 주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웨스트 뱅크(요르단 강 서안)와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격리한 채 난민이 되어 버린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상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예루살렘상에 대해 조사해 본 결과, 수잔 손탁이나 아서 밀러 등, 지금까지의 수상자들 가운데에는 이스라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연설을 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 연설의 내용 역시 공개되어 있었다. 만일 그들과 같이 사람들 앞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가 볼 만한 가치는 있을 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을 거부하는 것은 부정적인 메시지이지만, 출석하여 수상식 자리에서 연설을 하는 것은 긍정적인 메시지에 해당한다. 그리고, 항상 가능한 한 긍정적인 방향을 취하는 것이 기본적인 나의 생활 방식이다.

또, 이 상은 예루살렘 북 페어에 속하는 상이며, 국가로부터의 초대 같은 건 아니었다. 소설이나 책 등에 의해 연결된 사람들이 한 일본인 작가를 초대하는 것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나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상을 받는다, 받지 않는다 같은 양자택일 보다는, 오히려 예루살렘의 독자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그곳으로 가자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2월 27일에 가자 공습이 시작되어 버렸고, 나는 또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일반 시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격리된 도시에 대해 이스라엘 군은 최신 병기를 이용한 격렬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기 마련이다. 첫 연락에서는 12월 중에 수상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했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발표는 되지 않았다. 가자 침공이 시작된 이후 1월 18일 일방적 정전에 이르기까지, 문의를 해 보아도 사무국에서는 도통 반응이 없었다. 그 쪽에서도 나름 혼란스러웠는지도 모른다.

1월 21일, 이스라엘의 유력지인 <하레츠>가 나의 수상소식을 발표했다. 벌써 그 즈음에는 폭격으로 인해 13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일단 주최측에서 사전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연설문을 썼다. 외교관이나 정치가들이라면 이런 시점에서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도, 소설가라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 보다는, 소설가의 시점에서 어떻게 사건을 포착하고,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호소하는 것이 좀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한 사람의 소설가로서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연설문을 쓰는데는 3일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평소라면 직접 다시 영어로 번역했겠지만,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일단 일본어로 쓴 뒤에 내 원고의 번역을 담당해 주고 있는 제이 루빈에게 급히 번역을 부탁한 뒤, 그것을 다시 내가 조금 손을 보아 사무국으로 보냈다. 그 때 보낸 연설문이 바로 이 원고에 실려 있는 연설문이다. 세세한 부분은 현장에서 연설 도중 조금씩 바꾸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여기 있는 연설문대로 말했다.

만약 내용이 이래서는 곤란하다던가, 한 군데라도 표현을 바꿔달라고 부탁해 온다면 그 자리에서 수상을 거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무국에서는 "원고 감사합니다" 라고만 짧게 답신을 보냈고, 그렇다면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에 다녀오자 하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수상 사실이 보도된 뒤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련하여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떤 일이라도 세상에는 찬반 양론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예를 들어 내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를 통해 팔레스타인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갖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말 중요한 문제이니까.

다만 한 편으로, 자신은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정론만을 펴는 사람도 적지는 않지 않았을까 하고도 생각한다. 물론 정론을 편다는 것 자체가 어떤 종류의 힘을 갖는 경우도 있지만, 소설가의 경우에는 다르다. 소설가가 당연한 소리만 하고 있으면, 점차 글의 힘을 잃게 되고, 이야기가 메말라 버리기 쉽다. 나로서는 정론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자신의 말로써 호소하고 싶었다.



이스라엘 체재



일본에서 출발한 것이 2월 12일. 다음 날, 로마를 경유해서 이스라엘에 도착, 예루살렘에서 3박, 텔아비브에서 1박을 거쳐, 18일 귀국했다.

나는 애당초 이야기를 그리 잘 하는 편은 못된다. 아버지의 장례식 자리에서 숙부께 인사를 드리자, "넌 역시 쓰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좋겠구나"하고 말하신 적이 있을 정도니까(웃음). 일본에서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고, 외국 대학이나 문학상의 초청을 받아 한 해 한 번 정도는 영어로 강연 비슷한 것을 하는 정도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것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91년부터 4년 정도 미국에서 살면서 일본의 문화적 발신력(發信力)이 얼마나 약한지를 새삼 통감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일본 경제가 잘 나가던 시절이었던 탓도 있겠지만, 미국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도 줄창 경제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 버렸다. 참 씁쓸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소설가로서 해외로 나가게 되면,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설령 하고 싶지는 않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연설에 있어서는 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피아니스트가 악보를 놓고 연주를 하는 것처럼, 연단에 일단 원고는 올려 놓지만, 이번 연설처럼 15분 남짓한 길이의 연설이라면 가능한 한 암기하려고 노력한다. 일본에서는 바빠서 연습할 시간이 없었던 탓에, 비행기 안이나 호텔 방에서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연설에서 나는 이스라엘이 나쁘다고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나의 비판적 견해는 전해질 수 있도록 신경을 썼지만, 콕 집어서 비난하는 그런 말은 피했다.거기에 대해 무르다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에게는 소설가의 말과 문맥이 있다. 다른 말이나 문맥을 쓴다면 거짓말이 되고 만다. 게다가 직설적인 표현으로 비난을 해 버리면, 방어기제 같은 것이 작용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 내 말을 머릿 속에서 지워 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것이 내 본심이었다. 이 문제는 간단히 흑백으로 구분할 수 없는 성질의 문제였다. 실제로 현지에 가 보니, 그것이 공기를 통해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체제나 시스템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의 마음과의 관계는 내가 작가로서 일관되게 써 내려오고 있는 테마이다. 이런 것이라면 자신의 말로써 분명하게, 확실히 표현할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도 내 호소가 그런대로 먹혀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상식 장내에는 7백명 정도의 청중이 있었는데, 내가 연설을 끝내자 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열심히 박수를 쳐 주었고, 그건 대단히 기쁜 일이었다. 적어도 신발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웃음). 그 중에는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내 마음은 대강 전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시몬 페레즈 대통령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수상식이 시작되기 전 그는 "나는 14년 전 <노르웨이의 숲(국내명 상실의 시대 - 역자 주)>을 읽었네. 자네의 책은 매우 좋은 책들이더군"하고 말했다. 분명 10년 전쯤, 그가 연설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인용해서 놀랐던 적이 있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분명 실제로 잘 읽어 주었던 것이겠지.

그런데, 연설 중간부터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연설이 끝난 뒤에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들 일어나서 박수를 치자,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 뒤에도 이미 부드러운 분위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분명 그에게는 그의 입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 시장인 닐 바라캇은 연설이 끝난 뒤에도 대통령 앞에서 적극적으로 악수를 청하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당신의 의견은 소설가로서 매우 성실한 의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칭찬해 주었다. 이 말은 꽤나 기뻤다.

그는 작년 11월 시장이 된 사람으로, 아직 채 50이 되지 않았다. 원래는 IT기업가로, 비지니스를 그만 둔 뒤 정치계에 입문했다고 한다. 풀코스 마라톤을 몇 번인가 뛴 적이 있다고 해서, 수상식이 시작되기 좀 전에 둘이서 마라톤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스라엘에도 다양한 생각을 갖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있어서 큰 수확이었으며, 이스라엘에 가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총론(總論)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다. 개인이라고 하는 존재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된다고 하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이스라엘에 가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고 해서 '용기가 있다'라고 말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나 자신이 특별하게 용기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은 독재국가가 아니고, 기본적으로는 언론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니까. 그보다는 게스트로 초청받아, 여러 모로 친절한 대우를 받는 가운데 그런 사람들 앞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해야만 했던 사실에 대해 다소 괴로운 감정이 들었다. 말해야만 하는 사실을 말한 것이니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오히려 더 괴로웠다. 솔직하게 감사합니다 라고만 말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부로 이어짐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Undertaker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3/04/0200000000AKR20090304185100001.HTML?did=1179m

오늘 강의에서는 안락사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아니, 사실 윤리 문제를 다루는 수업은 아니었지만, 텍스트가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이다보니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고, 이런저런 흥미로운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 자신, 안락사에 대한 이렇다 할 뚜렷한 입장은 없는 편이다. 현재 상태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반대에 가깝겠지만, 확연한 의식을 가지고 반대하는 것도 아니니 이를 반대라고 보기도 어렵겠다.

다만 자료를 보고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얻은 것이 있다면, 세간에서 이야기하듯 안락사라는 것이 자기결정권과만 관련되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안락사-다른 말로는 존엄사라고도 하지만 일단 이 글에서는 안락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겠다-는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행위다. 여러 차례의 공론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안락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약물 투여 등의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해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적극적안락사, 그리고 치료 행위를 중단함으로써(예를 들어 산소호흡기를 제거한다던가) 자연에 맡기는 소극적안락사가 있다.

안락사의 기준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것은 본인의 의지, 그리고 안락사에 임함에 있어서 이런 '적극적 개입'의 여부이다. 일반적으로 적극적 안락사는 살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보통 안락사라고 함은 소극적 안락사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럼 먼저 본인의 의지를 살펴보자. 자신의 생사여탈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데, 일단 일차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과연 한 사람이 내린 결정이 영원불변 확고하느냐의 문제다.

예를 들어, 특히 이런 문제는 불의의 사고에서 많이 생기기 마련인데,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실려갔다고 하자. 이런 경우 본인이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평소 이 사고자가 안락사를 원하고 있었을 경우, 그런 의사를 표현한 내용의 문서를 소지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다(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본인의 의사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셈이 되므로 이 논의에서는 부득이하게 제외하자). 그렇다면, 이 사람의 의사는 '부득이할 경우 안락사를 원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은 숱한 결정을 내리지만, 언제나 후회를 하곤 한다. 그런 점에 비추어볼 때, 이 사람이 평소에 '괴롭게 사느니 편하게 죽는게 낫다'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현재 사고를 당해서 누워 있는 이 순간의 의사는 그와 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바꿔보자. 이것은 교수님이 드신 예이지만, 어떤 사람이 천철에 뛰어들어 죽을 결심을 했다. 그리고 도저히 스스로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아, 친한 친구에게 자신을 밀어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승낙했고, 그렇게 둘은 기차역으로 갔다.

그런데 막상 철로가 보이고 달려오는 기차가 보이자 이 사람은 죽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나 그냥 살면 안될까?" 그런데 이 친구는 "니 입으로 자살한댔잖냐" 하고 휙 밀었다면, 이건 누가 보아도 명백한 살인이다.

이런 경우다. 사람의 생각, 판단, 결정은 언제나 바뀔 가능성을 갖고 있는데, 그런 문서만 가지고 본인의 의사를 판단할 수는 없다는 점이 먼저 제기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런 구체적인 예에서 벗어나 좀 더 철학적인 내용인데, 즉 "우리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맞는가"하는 점이다. 사람은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가정환경, 받아온 교육, 인간관계, 사회적 위치 등 수많은 요인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구속하고 선택권을 좁히며, 자유를 빼앗는다. 그렇다면 과연 '안락사가 낫다'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은, 정말 자신의 생각인가? 나의 환경, 나의 요건 때문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버리고 싶을 뿐은 혹시 아닌가?

자의에 의한 자기결정권에는 이런 두 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문제인 적극적, 소극적 태도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이는 이미 몇몇 학자가 주장한 내용이지만,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소극적"안락사와 "적극적"안락사가 과연 다른 것인가, 하는 문제다. 적극적 안락사는 약물 투여를 통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반면 소극적 안락사는 치료 활동을 포기함으로써 자연에 맡기는 것이다.

자연에 맡긴다는 말은 일견 좋아 보이고 덕분에 죄책감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학자들도 그렇고, 내 생각도 이 점에서는 그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인데, 과연 이것이 소극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바꿔 말하면, 치료 행위를 중단함으로써 초래하는 결과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이 사람은 죽는 것이다. 의사도, 가족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뻔히 아는 상황에서 그 행위를 선택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독을 투여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단지 치료 행위를 중단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하나의 선택, 하나의 행위이다. 투표에 있어서 기권도 하나의 행위이듯이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국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라는 안락사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바꿔 말하면, 안락사를 인정하려면 적극적 안락사든 소극적 안락사든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양 쪽 모두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적극적인 안락사는 살인이지만 소극적인 안락사는 살인이 아니라는 태도는 엄밀히 말하면 자연을 판 자기기만 행위에 불과하다.

안락사를 허용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각자의 생각이 있을 것이고, 양 측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다. 좀 더 활발한 공론화를 통해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는 말도 일각에서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안락사 문제가 과연 공론화해서 해답이 나오는 성격의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종교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자기 꼬리를 쫓는 강아지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찬성론자들의 논리 중 "선진국들이 도입하고 있으니 도입해야 한다"라는 논리만큼은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선진국들이 도입하는 것과 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사정이 있고, 한국에는 한국의 사정이 있다. 그것을 무조건 "선진국이 하니까 해야한다"라는 논리는 선진국이라는 이름이 주는 우월감을 빌려 상대의 논리를 후진적인 것으로 깎아내리려는 의도가-의도적이든 혹은 그렇지 않든 간에-다분하므로, 이런 논리는 지양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생각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Undertaker
최근 학부에서 우리 과가 단과대로 승격되면서 새로 브로셔를 만들게 되었는데...
여기에 조교기는 한데 소속기관이 애매한 내가 딱 걸려들었다.

그래서 교내에서 자료를 모으고 교수님들 연락해서 '사진 내놓으삼 탁탁탁'도 하고 뭐 이래저래 바쁜 척을 좀 했는데, 오늘은 이 브로셔 제작 자료정리의 일환으로 2010년 입시요강을 정리하고 있었다.

근데 이 자료라는것(자료는 우리 학교 입시관련부서 홈페이지에 올라온 요강이었다)을 정리하면서 든 생각은


뭐 이리 많아?


자료 량이 많다는 게 아니라, 모집시기니 전형이 뭐 이리 늘어났는지 원....

내가 입시생 시절에는 특별전형 일반전형 덜렁 두개. 여기에 기껏해봐야 농어촌특별전형 같은 극소수 선발 전형 한 두개 정도였는데, 자료 정리하면서 보니 무슨 전형만 10개 쯤은 되나보다.

내가 봐도 모르겠는데 대체 입시생들이 이걸 봐서 알아먹겠나...라는 생각도 들고, 그냥 간단하게 보면 될 것을 뭐 이리 전형도 많이 만들어서 이중 삼중으로 돈을 들게 하는건지...싶은 생각도 들고.

그나저나 지난번 문근영도 대학을 이 전형으로 들어갔던 것 같은데, 자기추천자 전형이라는 건 뭘 기준으로 선발하는 건지, 서류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르겠더라. 그냥 자기 자랑 잘하면 뽑히는 전형인가?

마지막으로. 우리 학교 수능 많이보는건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더라. 딱 한 전형 빼고는 전부 100% 수능전형이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개인적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입시  (1) 2009/03/31
HP Mini 1001 TU  (0) 2009/02/01
나른한 일요일  (0) 2009/01/18
오늘의 단상  (0) 2009/01/17
하하하하하하하하  (3) 2008/09/19
'객관' 이라는 허울좋은 이데아  (0) 2008/07/28
Posted by Undertaker
바로 엊그제 비슷한 글을 썼던 것 같은데, 오늘 떡하니 이런 뉴스가 올라와 있는 건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운이 나쁜건지(혹은 반대로 좋은건지...)

나는 인터넷 실명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도입해야만 하는 제도라고 보지만, 현재 이 이슈에 한해서는 반대의 입장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정부의 흑심이 너무 뻔히 보이는 상황이라서랄까. PD수첩 기자들도 되도 않는 이유로 잡아넣으려고 하는 세상에, 현재 상황에서 인터넷 실명제는 그야말로 자신들의 반대 여론 숙청하기의 도구로 이용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경우 자꾸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성향을 지닌 언론을 탄압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는 잘못된 것이고 이 점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서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독재정권에 가까웠던 이승만 박정희 시절에도 명백히 언론탄압은 잘못된 정책이었는데, 하물며 21세기인 현재 언론탄압이라는 건 또 무슨 말인가. 게다가 비교적 힘 있는 언론사에게도 이런 압력을 행사하는 정부이관대, 힘 없는 일반 민중들의 인터넷 언론에 대해서는 얼마나 그들의 권력을 남용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현 정부의 성향과 지금까지의 행적을 살펴보면 인터넷 실명제는 국민을 찌르는 칼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므로, 현재로서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아래 글에서도 주장했듯이 장기적으로는 인터넷에서 실명을 도입하는 건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옛말에도 있지만 자고로 사람은 자신의 언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인터넷의 경우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무기삼아 무책임안 언행을 일삼는 계층들이 너무 많다. 그들의 태도를 보고 있자면, 마치 국회의원이라는 탈을 쓰고 국가에 기생하고 있는 무리들의 그것, 혹은 조선일보 식의 전형적인 아니면 말고식 기사와도 너무 닮아있음에 깜짝 놀라곤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들은 위에 예로 든 작자들보다도 더 악질이다. 적어도, 저들은 저런 말을 거론할 때 자신의 실체는 드러내놓은 상태에서 말을 꺼내니 말이다. 반면 인터넷 상의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익명성 뒤에 숨어서 배설하고 싶은 대로 배설해내곤 한다.

물론 실명제는 쓰기에 따라서는 언론 탄압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도구이다. 하지만, "실명제"라는 도구는 어디까지나 '도구'에 불과하다. 결국 이 도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이 도구가 유익할 수도, 혹은 우리를 해치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의 이번 이슈에 대한 입장도 근본적으로는 이와 다르지 않다. 실명제는 필요한 도구이지만, 현재로서는 현 정부의 손에 이 도구가 쥐어질 경우 흉기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도구의 존재 자체가 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앞으로의 생활에 있어서는 필요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 역시 가지고 있다.

과연 4년 후 한국의 정권을 어떤 사람이 쥐게 될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은 부디 실명제라는 도구를 유익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Undertaker

흔히 '지름신'으로 대표되는 소비성향이 있다. 갑작스러운 충동구매를 희화화/의인화하여 지칭하는 용어인데, 뭐 나도 지름신이라는 용어는 사용하고 그리 거부감은 없는 편이다. 다만, 이것이 어느 정도의 범위 이내일 때에는 희화화에 대해 웃어 넘길 수도 있고 나름 유머도 느낄 수 있지만, 이것이 자신의 수준을 뛰어넘어버리게 되면 그때부터는 사회적인 질환으로 발전한다.

지름신이라는 용어까지는 그래도 소규모의 지름, 예를 들면 내 기준으로 보자면 적게는 3만원짜리 DVD를 질렀다던가 하는 수준에서 많게는 몇십만원짜리 미니 컴포넌트나 XBox360을 질렀다 정도를 주로 지칭하니 이 정도까지는 그렇다고 하자. 하지만 명백히 생활수준이 범용한 사람이 물건 하나에 몇백 몇천을 질렀다고 하면, 그리고 그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하면 이것은 지름신의 수준이라기보다는 이미 모 소설로 유명해진 쇼퍼홀릭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절대 액수가 높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누가 설령 한 벌에 3천만원짜리 옷을 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연수입이 몇십억에 육박하면 그것은 좋지 않은 소비행태라고는 할 수 없다. 그의 경제수준은 그런 재화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뒤집어 보면, 불과 3~5만원짜리 DVD 한 장을 샀다고 해도 그 사람의 수입이 한달 몇 만원 수준이라면, 이것은 명백히 그의 경제수준을 초과하는 소비이고 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좋지 않은 행위이다.

물론, 단순히 이 기준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여기에 소비행위의 빈도수 또한 고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예로 설명하자면, 단적으로 좋지 않은 소비형태라고는 했지만 월 5만원의 수입이 있는 사람이 매월 만원씩 모아서, 5달만에 DVD 한 장을 샀다고 하면 이것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또 반대로 연수입 10억인 사람이 3천만원짜리 옷을 사는 경우에도, 이 사람이 그런 옷을 한 달에도 서너 벌씩 산다면 이것은 분명 그의 수준을 넘어서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과소비라는 건 "전체적인 액수를 총합하여 높은 빈도로 자신의 경제능력을 상회하는 소비행위를 하는 것"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극단적인 예로 옛날에 모 프로그램에 나왔던 명품중독 주부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이 버는 돈으로도 모자라서 남편이 버는 돈까지도 명품에 쏟아붓고, 그조차도 모자라서 결국엔 카드빚까지 내면서 명품을 사다모으는, 뭐 그런 이야기다.

최근에는 이런 좋지 않은, 일종의 쇼핑중독까지도 지름신이라느니 쇼퍼홀릭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여 긍정적인 이미지가 되어 가고 있는 듯 하고, 이런 점은 매우 우려스럽다. 개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가 벌어서 내 돈을 쓰는데 뭐가 문제냐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이야기다. 먼저 사회는 나 혼자 무인도에 틀어박혀서 인터넷 클릭으로만 쇼핑하는 곳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사람은 사회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고, 즉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개개인이 노출된다는 이야기이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데는, 일본인의 논리는 아니지만 저마다 적절한 위치가 있기 마련이다. 패리스 힐튼이 상류사회 파티에 몇천만원, 몇억짜리 드레스를 입고 나온다면 그건 아무 위화감이 없겠지만, 평범한 회사원이 몇백, 몇천만원짜리 명품이나, 몇십억짜리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면 그것은 분명 위화감이 들 수 밖에 없다.

두 번째로, 이것은 결혼하지 않고 부모님과도 상관없이 평생 독신으로 혼자 살 사람이라면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인간은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가정이라는 곳은 혼자가 아니다. 나 혼자만의 욕망을 충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여기에 부모님이나 자식이 추가되기도 한다.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한, 그 사람은 "내가 벌어서 내가 쓴다는데 무슨 상관이야?"따위의 말을 꺼낼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무책임한 발언이고 태도다.

조금 전 예로 든 명품족 주부의 경우가 바로 이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과소비로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남편까지도, 결국은 집안의 재정상황 자체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나 하나만의 문제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내가 내맘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인가"라는 발언을 아무 책임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저런 논리를 적용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엉망이 될 것이다. 내가 만든 회사에서 내가 사람 고용하겠다는데 장애인차별금지는 왜 있으며 노동자 보호는 왜 해야 하는가? 내가 맘에 안들어서 내가 만든 회사에서 내가 사람을 자르겠다는데, 너희가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것은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소비에 대한 "내맘대로"주장 역시 마찬가지 맥락이다.

돈을 모아서 자신이 사고 싶은 것을 사는 것, 물론 좋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능력의 범주 안에서 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 외의 것을 사고 싶다고 앞뒤 생각없이 사버리는 순간,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이 속한 집단마저 불핼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대책없이 지르기 전에 한번쯤 자신에 대해 뒤돌아보는 태도, 필요하지 않을까?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락사,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1) 2009/04/04
구글과 실명제  (1) 2009/03/30
지름신 문화에 대한 반성  (0) 2009/03/30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0) 2009/03/29
본색  (0) 2009/03/04
1박 2일 한심하다....  (0) 2008/09/19
Posted by Undertaker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나'라는 존재도 인터넷 매체를 이용하는 사람 중 하나이기는 하고, 그런 점에서는 굉장히 모순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인터넷 매체의 미래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이지는 않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지만 인터넷 역시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보는 사람들이 양존하며, 대충 살펴보자면 자유로운 정보의 교환, 각 개인의 언론화, 여론 형성의 장 등등이 좋은 측면이 되겠다. 반면에 익명성으로 인한 무책임화, 자아분열화 등은 나쁜 측면이 될 텐데

지금까지 인터넷의 악영향을 많이 보아와서인지는 몰라도 나라는 인간은 인터넷이 실제 사회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미치는 점도 물론 많지만, 그 긍정적인 영향을 뒤덮어버릴 정도의 악영향도 많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말을 한다면 뭐 딴나라당 알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서도 얼마 전 한나라당이 현재는 고인이 된 누군가의 이름을 빌어 법제화하려 했을 땐 그 배후의 의도가 의심스러워 반대에 기울었으나,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배후에 다른 의도가 있지 않다고 한다면 인터넷 실명제는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굳이 네이버나 야후, 혹은 각종 포탈 사이트의 댓글만이 익명성의 폐해를 나타내고 있는 건 아니다. 좀 더 넓게 보면, 인터넷의 각종 커뮤니티 및 블로그, 홈페이지... 즉 인터넷의 모든 곳에서 이런 폐해는 쉽게 볼 수 있다. 실제의 자신을 나타낼 필요가 없으니, 말도 쉽게 하고 상대방에 대한 모욕에도 부담이 없게 된다. 직접 맞보고 있는 상대방이라면 얻어맞는 게 두려워서라도 안하겠지만, 인터넷 공간에서는 다르다. '니가 나에 대해 뭘 아는데? 어디 해 볼테면 해 보시지'라는 심리랄까. 혹은 이 정도까지 노골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상대방과 나 사이에 실제의 3차원 공간이 없다고 하는 것, 따라서 상호간 실체의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건 아무래도 자기 규제를 약화시키기 마련이다.

흔히들 인터넷 악플을 다는 사람들을 정작 추적해보면 멀쩡히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사회생활에서의 스트레스를 익명성을 이용해서 인터넷에서 발산시킨다는 해석이 가능할까. 이건 어떻게 보면 아예 실제 인간 자체도 악플과 똑같은, 그런 사람들보다도 더 악질이다. 익명성을 이용해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배설하고 다니는 셈이니까.

물론 인터넷 실명제는 어느 정도 언로를 차단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고, 이것은 부정적인 측면에 해당한다. 그러나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짧게 보아 현대적 의미의 언론이 발달하기 시작한 지난 200~300여년간, 길게 보면 인류의 역사와 동일한 언론의 역사인데, 그 동안 언론이 글쓴이의 존재를 숨기고 나타났던 적은 그리 많지 않다. 예외를 들어보면 유언비어 등이 있는데 유언비어는 사실 인터넷의 폐해 만큼이나 부정적인 측면도 많은 언론의 형태였다.

결국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논의는 '인터넷으로 인한 긍정적인 여론효과가 큰가, 혹은 인터넷으로 인한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큰가'라는 문제고 양자간 어느 쪽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판단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한 태도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분류하자면 후자라는 얘기고. 기본적으로 인터넷의 자체 정화기능 다위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태들을 보면, 과연 자체 정화기능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일지 매우 의심스럽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개인적인 견해로는 인터넷에서 익명성 뒤에 숨어서 발설되고 있는 온갖 형태의 정치적 발언들보다는 차라리 월간조선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한다. 익명성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월간조선은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가? 비난이든 동의든 그것이 돌아갈 주체가 명확하지만, 인터넷에서 근거도 없이 확대재생산되는 루머들은 주체도 없고 증거도 없다. 물론, 나는 월간조선의 논조에 동의하지도 않고 그들이 올바른 정치세력을 언로를 통해 뒷받침하고 있다고도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익명성과 책임이라는 문제하에서 바라보면 그들은 인터넷의 루머보다는 낫다.

사실상 정치적인 색깔을 빼고 이 인터넷 실명제, 혹은 인터넷의 익명성에 대해 바라보면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이것을 단순히 '실명제를 지지하니 넌 딴나라파' 혹은 '실명제를 반대하는 넌 좌빨'이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는 문제라는 이야기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 논조를 배제한 상황에서 여러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글과 실명제  (1) 2009/03/30
지름신 문화에 대한 반성  (0) 2009/03/30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0) 2009/03/29
본색  (0) 2009/03/04
1박 2일 한심하다....  (0) 2008/09/19
시사저널 사태  (0) 2007/01/25
Posted by Undertaker
사용자 삽입 이미지


뭐 이 양반 이야기다.

축구에 관심이 많은 관계로 어쩔 수 없이 포스팅을 하다 보면 이쪽 이야기도 하게 되는데....



거스 히딩크(정확하게는 한국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그의 명칭인 "거스" 히딩크는 오기이다. 네덜란드인이므로 네덜란드식으로 부르자면 "거스" 가 아니라 "후스", 혹은 "휘스"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이름이다. 뭐, 한국에서는 이미 "거스"가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 봤자 소용도 없지만)에 대한 한국민의 감정은 월드컵 4강과 더불어 거의 신격화(?)에 가까운 것이라 함부로 그를 좋지 않게 말할 수는 없는 일종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데...


오밤중에 홍두깨같이 왜 갑자기 히딩크 얘기를 꺼내냐 하면 EPL감독 연봉순위를 보고 문득 생각이 나서였다.

Top Premier League earners

1 Guus Hiddink (Chelsea) £5.2m per year

2 Rafa Benitez (Liverpool) £5m

3 Arsene Wenger (Arsenal) £4.5m

4 Sir Alex Ferguson (Man Utd) £3.6m

5 David Moyes (Everton) £3.2m


뭐, 저 연봉이 러시아 감독직 연봉까지 포함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든 그렇지 않든간에 저 연봉이 웬만한 슈퍼스타급 선수 연봉만큼 한다는 건 뭐 다 알만한 소리다.

좋은 의미로든, 아니면 나쁜 의미로든 히딩크는 상당히 영악하다. 자신에게 손해가 될 일은 절대 맡지 않는다.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지만, 이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 중 하나가 지나치게 돈 냄새에 집착하다가 그만둘 때를 놓치고 망한다는 건데, 히딩크는 이런 의미에서는 물러날 때를 정확히 파악하는 무서운 인간이다.

가장 좋은 예가 한국 감독의 예일 것이다. 주판알을 튕겨본 다음, 개최국의 이점에 선수들의 클래스가 아주 빈약하지도 않고(아주 뛰어나지도 않았을지언정), 게다가 16강 진출이 목표. 솔직하게 말해서 대회 개최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허들은 굉장히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감독직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 태세. 히딩크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물러설 때를 안다는 건 월드컵이 끝난 후 한국축구협회에서 아주 좋은 조건으로 그를 붙잡아두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련없이 한국을 떠났다라는 점이다. 뭐,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성공을 거둔 뒤 쿨하게 떠나는 그의 모습이 멋져보였을지도 모르겠다만, 사실 히딩크가 이런 행동을 취한 건 다 냉정하게 계산된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엇보다도 이제 월드컵을 한 번 개최했으니 당분간은 국제대회(특히 월드컵)를 개최할 일이 없고, 따라서 개최국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4강까지 진출해 버리면서(?) 팬들의 눈 또한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는 것. 아무리 돈을 많이 쥐어줘도 이런 요구에 한국 정도의 팀으로는 부응할 수 없다는 걸 그 팀을 이끌면서 누구보다 잘 파악했을 히딩크고, 그랬기에 미련없이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이번에 첼시 감독을 맡은 것도 참으로 히딩크답다. 살펴볼까? 첼시는 히딩크가 부임하기 직전, 맨유에게 0-3으로 완패하면서 최악의 분위기를 달렸다. 리그 초 잘나가던 분위기와는 달리 계속해서 졸전을 거듭하며 이겨야 할 상대에게 이기지 못하고, 각종 대회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자면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지원이 부족했다느니, 스콜라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적었다느니,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당장 눈 앞에 놓인 상황은 그러했다. 요컨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 감독직이라는 조건하에 감독을 맡은 히딩크의 처세술은 영악한 단계를 넘어 등골이 오싹하기까지 한 게 사실이다. 따져보면, 리그 우승 가능성은 결코 높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임한 만큼 그로서는 "리그 우승을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언론 플레이를 날려주면서 적당히 2~3위만 해 줘도 결코 밑지지 않는 장사다. 만약 낮은 가능성이기는 해도 1위를 차지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로또 대박만큼 좋은거고, 못해도 히딩크가 책임질 일은 없다는 거다. 챔피언스 리그도, FA컵도 마찬가지다. 애당초 그가 오기 직전의 상황 하에서는 이런 대회들에서 우승을 바랄 수 있는 경기력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그는 단기 감독인 데다가 시즌도 절반이 넘은 상황에서 주어진 전력만 가지고 팀을 꾸려나가는 상황이기에, 얼마든지 변명거리는 많다. 다시 말해서, 히딩크에게 지금의 첼시는 전형적인 "밑져야 본전"인 자리라는 점이다. 게다가 구단주는 두둑한 급료를 약속했다. 이 얼마나 천국 같은 자리인가?

사실 히딩크라는 사람은 언제나 그랬다. 어느 쪽이냐 하면 안정적이라기 보단 도전적인 사람이지만, 일견 사람들의 눈에는 무모하게 보일지라도 그는 철저하게 주판알을 튕겨본 후 승산이 있는 승부에만 몸을 던졌다. 좋게 말하면 한국을 비롯한 여러 언론들이 말하는 것처럼 승부사적 기질이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한다면 영악한 사람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점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히딩크가 가지고 있는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보면, 선수단 관리와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주제 무리뉴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무리뉴조차도 능가하는 최고의 수완가라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인 전술 구사능력은 그의 명성만큼 대단하지는 않다고 본다. 선수단 관리에 있어서도, 유명하지 않은 선수들을 규합해 120%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점에서는 초일류지만, 이미 유명한 스타들을 모아놓은 팀에서 성적을 끌어낼 수 있는 타입의 감독인가? 라고 묻는다면 역시나 그의 명성에 비하면 약간 모자라지 않는가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는 첼시에서의 이번 시즌은 이러한 자신에 대한 평가를 뒤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긴 한데, 과연 그가 이걸 승부처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단 첼시에서의 그의 상황은 승부수를 던졌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안전한 입장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 그는 성적이 좋으면 당연히 자신이 칭송을 받겠지만, 좋지 않아도 그 자신이 비난을 받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예전처럼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물론, 일단 팀을 맡은 이상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일은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앞서 의문점을 제기한 스타군단의 관리라는 측면에서 그를 따라다니는 커리어의 오점이 바로 레알 마드리드 감독 시절이다. 1998년 감독으로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이끌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고, 결국 이듬해 감독직을 그만두었다. 그 이전 이끌었던 네덜란드에서는 94년 미국 월드컵에서 팀을 4강까지 이끌었으나 브라질에 가로막혀 좌절한 바 있다. 다만 이 네덜란드 시절은 내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자면, 스타군단이라기 보다는-물론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이때의 오렌지 군단은 분명 스타군단이긴 했지만-오히려 변화 과정에 있었고 그런 점에서 팀을 새로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히딩크에게 적합한 팀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 이전의 네덜란드 대표팀이라고 하면 70년대의 영광을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이후 해묵은 인종간의 반목 탓에 제 실력을 내지 못하던 전형적인 대표팀이었으니 말이다(이것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이 바로 히딩크의 네덜란드 대표팀이다).

감독으로서의 히딩크를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물론 그는 훌륭한 감독이고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축구 감독들을 순위를 매긴다고 해도 적어도 열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할 인물이겠지만, 과연 그가 (게다가 단기 알바라는 점을 감안할 때)EPL에서 최고 연봉을 받을 만한(게다가 EPL에서는 살아 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는, Sir 알렉스 퍼거슨과 아르센 벵거를 제치고 말이다)감독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다.

본인도 꾸준히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지만, 그는 절대 첼시를 다음 시즌에는 맡지 않을 것이다.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첼시라는 구단의 요구치는 너무나도 높고, 게다가 첼시의 경쟁자는 퍼거슨의 맨유를 비롯해 현재 세계에서(가장 레벨이 높은 리그가 어디냐라고 하는 그런 해묵은, 게다가 소모적인 표현은 지양하더라도) 가장 경쟁력 면에서 상위권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는 EPL의 Big3(원래는 4이지만 첼시를 제외하면 3지 않은가)다. 이런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도박은 히딩크의 성미에는 맞지 않는다. 필경 그는 첼시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다시 러시아 팀을 전담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게다가 이번 EPL 시즌이 끝나면 월드컵까지는 불과 1년이 남는다. 러시아 대표팀 감독으로서는 여러 모로 바빠질 시기가 다가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히딩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위대하다고 이름붙일 수 있는 감독들의 대열에 들어가는 감독인 만큼 이 사람의 행보에는 싫든 좋든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다. 과연 2010년 러시아는 남아프리카에 갈 수 있을까? 간다면 얼마나 올라갈 것인가? 아마도 히딩크 얘기만 나오면 호들갑을 떠는 한국 언론들을 생각할 때 싫어도 알게 될 테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소망을 말하자면, 사실 반 마르바이크에게는 별 기대도 안하고 하루빨리 물러나주었으면 하며 감독으로서의 역량도 히딩크에는 한참 못미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네덜란드가 본선 무대에서 러시아를 만나 유로에서의 복수를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스포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Guus Hiddink  (0) 2009/03/28
가을이다!  (0) 2008/10/21
현재까지의 프리미어쉽 빅4 이적시장  (1) 2008/07/29
대책없는 쿠만-_-  (0) 2007/12/19
리켈메의 미래는?  (2) 2007/11/22
앙리 진짜 나가니?  (0) 2007/06/23
Posted by Undertaker

본색

2009/03/04 01:0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처음에 제목을 타락이라고 했었지만, 아무래도 적절한 제목이 아닌 듯 해 수정했다.

타락은 본래 깨끗했거나 정당했던 사람이 더러워지거나 부정을 저질렀을 때 사용하는 어휘인데, 이 양반의 경우는 이보다는 본색이 드러났다고 해야 옳을 듯 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반어법 이후에 해명글, 그리고 그에 따른 많은 반론들(심지어는 대학 교수님의 반론까지)이 있기에 굳이 이제와서 내가 조목조목 신해철이 늘어놓은 궤변들을 따지는 건 에너지의 낭비이고 봐 줄 사람도 없기에 그런 건 굳이 하지 않는다. 뭐, 일기장에 끄적거리는 느낌으로 적고 있기에 문체도 경어가 빠져있지만.

팬이라고까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꽤나 신해철을 좋아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무한궤도때부터 쭈욱 들어왔...더라면 올드팬이겠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다. 아마 처음 들었던 건 넥스트 2집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쭈욱 넥스트의 음악을 들었었고 가끔은 심각하다 못해 오버스럽기까지한 가사를 보면서도 서태지의 그것과는 또 다른 장르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었고, 그런 일면에 나름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라디오를 시작했고, 이것은 넥스트의 보컬 신해철을 마왕이라는 위치로까지 승격시켜 주었다.

특히 군대시절 고스트를 많이 들었었는데, 처음에 의외였던 건 어린 애청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해철의 음악적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절을 2000년대 초반의 중고등학생이 함게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은 라디오를 통해 팬이 된 후 음악을 접한 케이스도 많았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있었겠지만.

올드 팬들과 이런 신규(?) 팬들의 추종에 힘입어 그는 마왕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솔로활동 때에도 은연중에 이런 칭호를 의식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곤 했다. 뭐, 그때의 나는 그를 꽤 좋아했던 편이기에 나름 유쾌했지만.

이렇게 마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후, 또 그는 갑자기 시사프로그램의 게스트로도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연예프로그램이나 쇼프로그램 등에 나오는 거야 연예인들에게는 비일비재하니 별 감흥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시사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은 극히 일부였기에 이런 그의 행보에는 또 주목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름 시사프로그램에서도 그만의 언변을 바탕으로 좌파의 예능계 아이콘같은 위치를 얻기 시작했다. 고스트의 애청자들과 팬들에게 받은 마왕이라는 칭호에, 시사프로그램에서 얻은 이러한 좌파 성향의 연예인이라는 위치. 그에게는 아주 달콤했을 것이다. 불과 몇년 전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대중에게서 완전히 잊혀졌던 시절과는 천지차이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거창한 수식어는 그에게는 너무 큰 짐이었나 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신해철은 그 마왕, 좌파의 아이콘이라는 칭호 덕에 스스로 무너져 내린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사실 연예인이 광고하나 찍는데 이리 소란떨 필요도 없다. 최민수처럼 사채광고를 찍은것도 아니고(뭐 사실 엄밀히 말하면 사채광고 역시나 찍었다고 도덕적으로 욕먹을 건덕지는 없긴 하다) 기껏해야 학원광곤데.

하지만 그 학원광고라는게 그때까지 그가 이용해왔던, 좌파 성향의 연예인이라는 인식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그에게 무거운 짐이었다고 한 이유는 이 칭호들이 그에게 솔직하게 말을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왕이니까, 나는 아이콘이니까 뭔가 그럴듯하게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때부터 그의 뇌는 꼬이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처음 파문이 일었을 대 그냥 까놓고 '돈이 아쉬워서 했다'라고 했으면 욕은 바가지로 먹었을지언정 지금과 같은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체면을 유지하면서 어떻게든 '있는 척'을 하려고 했고, 그 결과로 장문의 궤변과 360도 전방위를 향한 욕설, 그리고 Fxxx Yxx로 대미를 장식했다. 이건 이미 변론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좌파적 연예 아이콘' 신해철이라는 존재의 사망신고서에 스스로 서명한 셈이다.

앞으로도 그의 콘서트장에는 팬들이 모일 것이고, 그들은 그를 마왕이라고 부르며 떠받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행이 불일치하는 나약한 인간임이 밝혀진 지금, 더 이상 그가 곡을 통해 어떠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해도 그 설득력은 이전의 10%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의 소신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의 메시지를 누가 순순히 받아들인단 말인가?

나 개인적으로는 이제 그에 대한 호감을 철회하고 안티가 되기로 했지만, 안티라고 해서 적극적인 안티를 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약간이기는 하지만 그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신해철이라는 인간의 그릇은, 시사적인 인물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좁았다. 좀 과하게 말하면 신해철은 분에 넘치는 옷을 입었다가 그 옷에 깔려서 넘어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른 지금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그가 시사프로그램에 나서지 않고 그저 고스트의 마왕으로 만족했더라면, 그 나름대로의 영역을 고수했을지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신해철의 이번 작태에 내심 가장 쾌재를 부른 건 보수를 자칭하는 일부 반동세력이 아니었을까(이들에게 보수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이 땅의 진정한 보수들에 대한 모독이다).

좌파적 연예인이 김장훈 하나로 줄었다는 점은 좀 아쉽다. 김장훈은 훌륭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신해철만큼의 이슈 메이커라던가 아이콘이 되기에는 약간은 모자란 면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굳이 분류하면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파 성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좌파든 (진정한)우파든 그들의 아이콘이 있다는 것은 정치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Rest In Peace, '좌파 연예인' 신해철.
그가 이 글을 볼 리도 없고 별로 기대도 안하지만, 나만의 조그만 소망이라면 앞으로는 부디 곡에 사회적 메시지나 심각한 무언가를 담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이미 그가 쓰는 그러한 메시지의 설득력은 0%에 수렴하니 말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름신 문화에 대한 반성  (0) 2009/03/30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0) 2009/03/29
본색  (0) 2009/03/04
1박 2일 한심하다....  (0) 2008/09/19
시사저널 사태  (0) 2007/01/25
사실 미국정부는  (0) 2007/01/14
Posted by Undertaker

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앞으로는 이래저래 문서쓸 일도, 편집할 일도 많아질 것 같고
학교에서 컴퓨터실을 사용하기엔 시간제약이나 불편함 등 이런저런 문제도 많은 고로


는 핑계고 사실은 디자인을 보고 지름신이 강림하셔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넵. 이 놈을 질러버렸습니다.
해외에서는 작년 후반기에(한국에서는 작년 12월경) 발매된 HP의 Mini 1000 시리즈이지요.

처음에는 가격의 압박도 있고 한고로 Mini 2133을 고려했었습니다만
무려 1Gb메모리에 비스타(...)를 얹은 무모함과 배터리 소모량으로 인한 한계점 때문에 눈을 돌렸습니다. 1013과 1001을 두고 고민을 좀 했습니다만(둘 다 Mini 1000시리즈이지만, 1013은 SSD장착형이고 1001은 일반 하드 장착형입니다) 역시 아무리 노트북이라지만 저장용량 16Gb는 좀 너무 작다 싶어서 1001을 선택했습니다. 게다가 인터넷에서 많은 분들의 평가를 살펴보니 SSD라고는 해도 저코스트화를 위해 초기형 SSD를 채택, 부팅속도 등 성능면에서도 일반 하드판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하시더군요(심지어 S-ATA도 아니고 P-ATA채택형인데!). 미련없이 1001로 돌아섰습니다.


일단 크기비교. 위 사진은 아래에 집에서 굴러다니던 토익계의 바이블인 해*스 문제집을 깔아둔 사진입니다. 디스플레이는 10.2인치이죠.


일단 스크롤 압박으로 가려두겠습니다.

요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개인적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입시  (1) 2009/03/31
HP Mini 1001 TU  (0) 2009/02/01
나른한 일요일  (0) 2009/01/18
오늘의 단상  (0) 2009/01/17
하하하하하하하하  (3) 2008/09/19
'객관' 이라는 허울좋은 이데아  (0) 2008/07/28
Posted by Undertaker

돈은 없고

전화비는 내 입이 파리의 개선문만큼 벌어질 정도로 나왔고

과제가 있는데 읽기는 귀찮지만 금요일까지는 요약에 감상에 질문까지 만들어서 보내야 하고

게다가 과제로 내가 맡은 1article 외에도 두 개가 더 있고

알바는 일정이 변경되서 이번주는 딸랑 이틀하게 생겼고

덕분에 급여는 줄었고(2/1일은 못한다고 이놈들아)

그래서 아티클이나 읽어볼까하고 손에 드니까 머리에는 안들어오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뭐 인생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그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개인적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입시  (1) 2009/03/31
HP Mini 1001 TU  (0) 2009/02/01
나른한 일요일  (0) 2009/01/18
오늘의 단상  (0) 2009/01/17
하하하하하하하하  (3) 2008/09/19
'객관' 이라는 허울좋은 이데아  (0) 2008/07/28
Posted by Undertaker
◀ PREV : [1] : [2] : [3] : [4] : [5] : ... [7] : NEXT ▶

BLOG main image
by Undertaker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4)
영화이야기 (5)
개인적인 이야기 (14)
세상 이야기 (9)
스포츠 이야기 (24)
게임 이야기 (1)
음악이야기 (0)

글 보관함

달력

«   2012/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 30,269
Today : 0 Yesterday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