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3/04/0200000000AKR20090304185100001.HTML?did=1179m

오늘 강의에서는 안락사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아니, 사실 윤리 문제를 다루는 수업은 아니었지만, 텍스트가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이다보니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고, 이런저런 흥미로운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 자신, 안락사에 대한 이렇다 할 뚜렷한 입장은 없는 편이다. 현재 상태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반대에 가깝겠지만, 확연한 의식을 가지고 반대하는 것도 아니니 이를 반대라고 보기도 어렵겠다.

다만 자료를 보고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얻은 것이 있다면, 세간에서 이야기하듯 안락사라는 것이 자기결정권과만 관련되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안락사-다른 말로는 존엄사라고도 하지만 일단 이 글에서는 안락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겠다-는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행위다. 여러 차례의 공론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안락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약물 투여 등의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해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적극적안락사, 그리고 치료 행위를 중단함으로써(예를 들어 산소호흡기를 제거한다던가) 자연에 맡기는 소극적안락사가 있다.

안락사의 기준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것은 본인의 의지, 그리고 안락사에 임함에 있어서 이런 '적극적 개입'의 여부이다. 일반적으로 적극적 안락사는 살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보통 안락사라고 함은 소극적 안락사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럼 먼저 본인의 의지를 살펴보자. 자신의 생사여탈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데, 일단 일차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과연 한 사람이 내린 결정이 영원불변 확고하느냐의 문제다.

예를 들어, 특히 이런 문제는 불의의 사고에서 많이 생기기 마련인데,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실려갔다고 하자. 이런 경우 본인이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평소 이 사고자가 안락사를 원하고 있었을 경우, 그런 의사를 표현한 내용의 문서를 소지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다(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본인의 의사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셈이 되므로 이 논의에서는 부득이하게 제외하자). 그렇다면, 이 사람의 의사는 '부득이할 경우 안락사를 원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은 숱한 결정을 내리지만, 언제나 후회를 하곤 한다. 그런 점에 비추어볼 때, 이 사람이 평소에 '괴롭게 사느니 편하게 죽는게 낫다'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현재 사고를 당해서 누워 있는 이 순간의 의사는 그와 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바꿔보자. 이것은 교수님이 드신 예이지만, 어떤 사람이 천철에 뛰어들어 죽을 결심을 했다. 그리고 도저히 스스로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아, 친한 친구에게 자신을 밀어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승낙했고, 그렇게 둘은 기차역으로 갔다.

그런데 막상 철로가 보이고 달려오는 기차가 보이자 이 사람은 죽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나 그냥 살면 안될까?" 그런데 이 친구는 "니 입으로 자살한댔잖냐" 하고 휙 밀었다면, 이건 누가 보아도 명백한 살인이다.

이런 경우다. 사람의 생각, 판단, 결정은 언제나 바뀔 가능성을 갖고 있는데, 그런 문서만 가지고 본인의 의사를 판단할 수는 없다는 점이 먼저 제기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런 구체적인 예에서 벗어나 좀 더 철학적인 내용인데, 즉 "우리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맞는가"하는 점이다. 사람은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가정환경, 받아온 교육, 인간관계, 사회적 위치 등 수많은 요인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구속하고 선택권을 좁히며, 자유를 빼앗는다. 그렇다면 과연 '안락사가 낫다'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은, 정말 자신의 생각인가? 나의 환경, 나의 요건 때문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버리고 싶을 뿐은 혹시 아닌가?

자의에 의한 자기결정권에는 이런 두 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문제인 적극적, 소극적 태도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이는 이미 몇몇 학자가 주장한 내용이지만,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소극적"안락사와 "적극적"안락사가 과연 다른 것인가, 하는 문제다. 적극적 안락사는 약물 투여를 통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반면 소극적 안락사는 치료 활동을 포기함으로써 자연에 맡기는 것이다.

자연에 맡긴다는 말은 일견 좋아 보이고 덕분에 죄책감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학자들도 그렇고, 내 생각도 이 점에서는 그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인데, 과연 이것이 소극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바꿔 말하면, 치료 행위를 중단함으로써 초래하는 결과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이 사람은 죽는 것이다. 의사도, 가족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뻔히 아는 상황에서 그 행위를 선택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독을 투여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단지 치료 행위를 중단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하나의 선택, 하나의 행위이다. 투표에 있어서 기권도 하나의 행위이듯이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국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라는 안락사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바꿔 말하면, 안락사를 인정하려면 적극적 안락사든 소극적 안락사든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양 쪽 모두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적극적인 안락사는 살인이지만 소극적인 안락사는 살인이 아니라는 태도는 엄밀히 말하면 자연을 판 자기기만 행위에 불과하다.

안락사를 허용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각자의 생각이 있을 것이고, 양 측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다. 좀 더 활발한 공론화를 통해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는 말도 일각에서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안락사 문제가 과연 공론화해서 해답이 나오는 성격의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종교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자기 꼬리를 쫓는 강아지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찬성론자들의 논리 중 "선진국들이 도입하고 있으니 도입해야 한다"라는 논리만큼은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선진국들이 도입하는 것과 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사정이 있고, 한국에는 한국의 사정이 있다. 그것을 무조건 "선진국이 하니까 해야한다"라는 논리는 선진국이라는 이름이 주는 우월감을 빌려 상대의 논리를 후진적인 것으로 깎아내리려는 의도가-의도적이든 혹은 그렇지 않든 간에-다분하므로, 이런 논리는 지양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생각한다.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 : 내가 예루살렘에 간 이유(1)  (2) 2009.04.05
구글과 실명제  (1) 2009.03.30
지름신 문화에 대한 반성  (0) 2009.03.30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0) 2009.03.29
본색  (0) 2009.03.04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