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본문은 문예춘추(文藝春秋) 2009년 4월호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로서, 원제는 '나는 왜 예루살렘에 갔는가(僕はなぜエルサレムに行ったのか)' 입니다. 문답 형식이 아닌, 자전 형식으로 쓰여진 인터뷰로서, 그가 예루살렘상을 수락하고 연설하게 된 경위 및 심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과 동일하게 말미에는 연설문 원고를  번역하여 실을 예정입니다(다만 본문이 꽤 긴 관계로 두 번에 나누어서 올려야 할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다음 번 2부가 올라올 때 같이 올릴 듯 싶습니다).

번역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역이 많은 편입니다(원래 저의 번역방침이 그런 편입니다). 그 외에, 하루키는 본문에서 경어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어로 경어체 번역을 할 경우 어감의 문제도 있으며 특히 한국에서는 보통 인터뷰나 자전체 글에서 경어를 생략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관계로, 한국식으로 경어를 생략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출처 : 연합뉴스)




2월 15일,  나는 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상을 수상하고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1월 하순에 수상 소식이 보도된 이래, 인터넷에서는 내가 수상 거부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다. 또 일부 신문들은 내가 오사카의 NGO단체가 발표한 공개질의에 대답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스라엘 군의 가자 침공에 항의하는 뜻으로 수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될 것이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사실, 나 역시 이 상을 받아야 하는지, 혹은 거부해야 하는지 꽤 긴 시간을 망설였다. 하지만 '상을 받기도 전에 이에 대해 의견표명을 한다는 것은 순서가 약간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름대로 여러 요소를 고려한 끝에, 개인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대해 사전에 변호나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원래 내 성미에는 맞지 않는다. 묵묵히 그 곳에 가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돌아와야겠다,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뭐 그 결과로 내 발언에 대해 누군가 비판한다고 해도 별 수 없는 일이다. 내 행동을 결정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고, 그런 이상 비판은 달게 받아야만 하는 것이니까.

친구들, 그리고 친분 있는 편집자들로부터도, 가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충고의 이메일이 오곤 했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장편소설이니, 챈들러의 번역이니 하는 일감을 세 권 분, 400자 원고지로만 4200장 정도를 떠맡고 있었고, 이스라엘로 떠나기 전에 이것들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말하면 1분 1초가 아쉬웠던 상황이었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을 여유는 전혀 없었다.

다만, 이것은 내 나름대로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세월 사귀어 온 사람들조차 그런 부분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좀 서운한 느낌도 들었다. 일본을 떠날 때는 고립무원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백주의 결투(원제 : High Noon - 역자 주)>의 게리 쿠퍼가 된 기분이랄까. 뭐, 그리 멋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기분상.



수상을 받아들인 경위


주최측에서 예루살렘 상의 수상 용의가 있는가 하는 문의를 해 온 것은 지난 해 12월 25일이었다. 이 때는 상을 받아야 할지 거절해야 할 지, 매우 고민했었다.

나라는 인간 역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는 편이었다. "외눈 장군"으로 일컬어지던 다얀 국방장관 시절부터 언론 보도를 체크하고 있고, 관련 서적들도 일단은 읽어 보는 등, 역사적인 경위도 대강은 머릿 속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유대계 주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웨스트 뱅크(요르단 강 서안)와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격리한 채 난민이 되어 버린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상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예루살렘상에 대해 조사해 본 결과, 수잔 손탁이나 아서 밀러 등, 지금까지의 수상자들 가운데에는 이스라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연설을 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 연설의 내용 역시 공개되어 있었다. 만일 그들과 같이 사람들 앞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가 볼 만한 가치는 있을 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을 거부하는 것은 부정적인 메시지이지만, 출석하여 수상식 자리에서 연설을 하는 것은 긍정적인 메시지에 해당한다. 그리고, 항상 가능한 한 긍정적인 방향을 취하는 것이 기본적인 나의 생활 방식이다.

또, 이 상은 예루살렘 북 페어에 속하는 상이며, 국가로부터의 초대 같은 건 아니었다. 소설이나 책 등에 의해 연결된 사람들이 한 일본인 작가를 초대하는 것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나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상을 받는다, 받지 않는다 같은 양자택일 보다는, 오히려 예루살렘의 독자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그곳으로 가자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2월 27일에 가자 공습이 시작되어 버렸고, 나는 또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일반 시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격리된 도시에 대해 이스라엘 군은 최신 병기를 이용한 격렬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기 마련이다. 첫 연락에서는 12월 중에 수상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했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발표는 되지 않았다. 가자 침공이 시작된 이후 1월 18일 일방적 정전에 이르기까지, 문의를 해 보아도 사무국에서는 도통 반응이 없었다. 그 쪽에서도 나름 혼란스러웠는지도 모른다.

1월 21일, 이스라엘의 유력지인 <하레츠>가 나의 수상소식을 발표했다. 벌써 그 즈음에는 폭격으로 인해 13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일단 주최측에서 사전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연설문을 썼다. 외교관이나 정치가들이라면 이런 시점에서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도, 소설가라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 보다는, 소설가의 시점에서 어떻게 사건을 포착하고,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호소하는 것이 좀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한 사람의 소설가로서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연설문을 쓰는데는 3일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평소라면 직접 다시 영어로 번역했겠지만,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일단 일본어로 쓴 뒤에 내 원고의 번역을 담당해 주고 있는 제이 루빈에게 급히 번역을 부탁한 뒤, 그것을 다시 내가 조금 손을 보아 사무국으로 보냈다. 그 때 보낸 연설문이 바로 이 원고에 실려 있는 연설문이다. 세세한 부분은 현장에서 연설 도중 조금씩 바꾸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여기 있는 연설문대로 말했다.

만약 내용이 이래서는 곤란하다던가, 한 군데라도 표현을 바꿔달라고 부탁해 온다면 그 자리에서 수상을 거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무국에서는 "원고 감사합니다" 라고만 짧게 답신을 보냈고, 그렇다면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에 다녀오자 하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수상 사실이 보도된 뒤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련하여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떤 일이라도 세상에는 찬반 양론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예를 들어 내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를 통해 팔레스타인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갖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말 중요한 문제이니까.

다만 한 편으로, 자신은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정론만을 펴는 사람도 적지는 않지 않았을까 하고도 생각한다. 물론 정론을 편다는 것 자체가 어떤 종류의 힘을 갖는 경우도 있지만, 소설가의 경우에는 다르다. 소설가가 당연한 소리만 하고 있으면, 점차 글의 힘을 잃게 되고, 이야기가 메말라 버리기 쉽다. 나로서는 정론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자신의 말로써 호소하고 싶었다.



이스라엘 체재



일본에서 출발한 것이 2월 12일. 다음 날, 로마를 경유해서 이스라엘에 도착, 예루살렘에서 3박, 텔아비브에서 1박을 거쳐, 18일 귀국했다.

나는 애당초 이야기를 그리 잘 하는 편은 못된다. 아버지의 장례식 자리에서 숙부께 인사를 드리자, "넌 역시 쓰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좋겠구나"하고 말하신 적이 있을 정도니까(웃음). 일본에서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고, 외국 대학이나 문학상의 초청을 받아 한 해 한 번 정도는 영어로 강연 비슷한 것을 하는 정도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것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91년부터 4년 정도 미국에서 살면서 일본의 문화적 발신력(發信力)이 얼마나 약한지를 새삼 통감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일본 경제가 잘 나가던 시절이었던 탓도 있겠지만, 미국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도 줄창 경제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 버렸다. 참 씁쓸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소설가로서 해외로 나가게 되면,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설령 하고 싶지는 않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연설에 있어서는 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피아니스트가 악보를 놓고 연주를 하는 것처럼, 연단에 일단 원고는 올려 놓지만, 이번 연설처럼 15분 남짓한 길이의 연설이라면 가능한 한 암기하려고 노력한다. 일본에서는 바빠서 연습할 시간이 없었던 탓에, 비행기 안이나 호텔 방에서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연설에서 나는 이스라엘이 나쁘다고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나의 비판적 견해는 전해질 수 있도록 신경을 썼지만, 콕 집어서 비난하는 그런 말은 피했다.거기에 대해 무르다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에게는 소설가의 말과 문맥이 있다. 다른 말이나 문맥을 쓴다면 거짓말이 되고 만다. 게다가 직설적인 표현으로 비난을 해 버리면, 방어기제 같은 것이 작용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 내 말을 머릿 속에서 지워 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것이 내 본심이었다. 이 문제는 간단히 흑백으로 구분할 수 없는 성질의 문제였다. 실제로 현지에 가 보니, 그것이 공기를 통해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체제나 시스템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의 마음과의 관계는 내가 작가로서 일관되게 써 내려오고 있는 테마이다. 이런 것이라면 자신의 말로써 분명하게, 확실히 표현할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도 내 호소가 그런대로 먹혀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상식 장내에는 7백명 정도의 청중이 있었는데, 내가 연설을 끝내자 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열심히 박수를 쳐 주었고, 그건 대단히 기쁜 일이었다. 적어도 신발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웃음). 그 중에는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내 마음은 대강 전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시몬 페레즈 대통령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수상식이 시작되기 전 그는 "나는 14년 전 <노르웨이의 숲(국내명 상실의 시대 - 역자 주)>을 읽었네. 자네의 책은 매우 좋은 책들이더군"하고 말했다. 분명 10년 전쯤, 그가 연설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인용해서 놀랐던 적이 있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분명 실제로 잘 읽어 주었던 것이겠지.

그런데, 연설 중간부터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연설이 끝난 뒤에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들 일어나서 박수를 치자,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 뒤에도 이미 부드러운 분위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분명 그에게는 그의 입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 시장인 닐 바라캇은 연설이 끝난 뒤에도 대통령 앞에서 적극적으로 악수를 청하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당신의 의견은 소설가로서 매우 성실한 의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칭찬해 주었다. 이 말은 꽤나 기뻤다.

그는 작년 11월 시장이 된 사람으로, 아직 채 50이 되지 않았다. 원래는 IT기업가로, 비지니스를 그만 둔 뒤 정치계에 입문했다고 한다. 풀코스 마라톤을 몇 번인가 뛴 적이 있다고 해서, 수상식이 시작되기 좀 전에 둘이서 마라톤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스라엘에도 다양한 생각을 갖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있어서 큰 수확이었으며, 이스라엘에 가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총론(總論)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다. 개인이라고 하는 존재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된다고 하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이스라엘에 가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고 해서 '용기가 있다'라고 말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나 자신이 특별하게 용기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은 독재국가가 아니고, 기본적으로는 언론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니까. 그보다는 게스트로 초청받아, 여러 모로 친절한 대우를 받는 가운데 그런 사람들 앞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해야만 했던 사실에 대해 다소 괴로운 감정이 들었다. 말해야만 하는 사실을 말한 것이니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오히려 더 괴로웠다. 솔직하게 감사합니다 라고만 말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부로 이어짐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락사,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1) 2009.04.04
구글과 실명제  (1) 2009.03.30
지름신 문화에 대한 반성  (0) 2009.03.30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0) 2009.03.29
본색  (0) 2009.03.04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